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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그리고 저 너머에

by 수호천사1009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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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성장의 단계

영적 성장 단계에 대한 작가님의 이론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먼저 제시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만큼 명쾌하지 못했다고 해요.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믿음의 단계의 저자인 미국 에머리 대학 캔들러 신학교의 제임스 파울러 교수입니다. 파울러 교수의 저서와 정신과 의사로서 작가님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님은 영적 성장에는 다소 분명히 구분 지어지는 몇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울러 교수는 영적 성장 단계를 6단계로 보았는데, 작가님은 이것을 4단계로 압축하여 《스캇 펙 박사 의 평화 만들기》에서는 더 깊이 있게 그리고 끝나지 않은 여행 에서는 좀 더 축소해서 썼다. 다음은 영적 성장 단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제1단계 이 단계는 혼돈스럽고 반사회적이다. 가장 원시적인 단계로서 사람들은 종교적일 수도 세속적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들의 '믿음 체계는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신조가 없다. 이 단계는 무법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제2단계 이 단계는 공식적이고 제도적이다. 이것은 법문의 단계인데, 근본주의자(가장 종교적인 사람 들을 뜻함)들이 나타난다.

 

・제3단계 이 단계는 회의적이고 개인적이다. 여기서 많은 세속주의자들이 나타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들은 확실한 물질주의 자처럼 보인다. 그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증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제4단계 이 단계는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이다. 종교적 발달 단계 중 가장 성숙한 단계로서 영혼의 법에 이른 단계일 것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이성적이지만 이성주의를 맹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의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만물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법칙'을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신성한 존재가 가지는 신비스러움에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이러한 단계들이 단순하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실제 그들의 발전 단계보다 더 앞선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상당히 많은 수의 새시대 운동가인 뉴에이저와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이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제4단계인 신비적인 단계에, 더욱이 매단계마다 점차적인 변화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의 사람들이 발전해 가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특정 단계에서 아주 붙박혀 있기도 한다. 그러나 각 단계들은 본질적으로 전 단계보다는 발전적인데, 예를 들면 제3단계에 있는 세속주의자들은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인 사람들보다 영적 발달에서 더 앞서 있다. 제2단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제3단계에 있는 세속적인본주의자들에 대해 비판 적이지만, 그들 자신이 보다 인본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을 영적 성장의 단계별로 분류하는 것을 우려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분리 효과,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공동체,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은 각 단계를 분류 함으로써 엘리트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볼 때, 소위 말하는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회의주의 자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응징했으며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작가님의 경험으로 볼 때 우리가 각기 다른 영적 발달 단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된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상대적으로 영적 발달이 덜 된 사람들 또한 공동체를 건설하고 영적으로 더 성장을 할 수 있으며, 가장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라도 그전 단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드 샌포드 마틴은 그의 시 <나는 무수하다>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내 속세의 성전에 군중이 모여 있다. 그들 중에는 겸손한 자, 거만한 자 자신의 죄악으로 상심한 자, 죄를 뉘우치지 않은 채 앉아서 웃고 있는 자. 이웃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자, 명예와 금전만을 신경 쓰는 자가 있으니. 그들 중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마음을 좀먹는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 이 같은 영적 성장을 위한 여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기본적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2. 이스라엘

구약 성서 서두의 이야기는 야곱에 대한 것이다. 야곱은 분명히 영적 성장의 제1단계에 속하는 인물로 형제를 속여서 유산을 가로채는 거짓말쟁이요, 도둑이요. 사기꾼이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면 야곱은 영 적성장 제1단계의 인물이 갖게 되는 전형적인 문제에 빠진다. 형제로부터 도망쳐서 사막을 헤매고 다니던 어느 날 저녁 그는 가족을 떠나 혼자 잠이 든다. 한밤중에 그는 매우 건장한 낯 선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싸운다.

이 처절한 싸움은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된다. 마침내 새벽의 첫 햇살이 지평선 너머 보이기 시작할 즈음, 야곱은 자신 이 우세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뻐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공격했던 이 낯선 자를 물리친다. 이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 낯선 자가 손을 뻗어 야곱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자 순식간에 야곱의 관절이 저절로 빠지고 부러졌다. 야곱은 엉금엉금 기면서 이 낯선 자에게 매달려 이미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그는 이미 완전한 패배자로 그만두자고 한다. 그의 운명은 이미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동이 틀 무렵 야곱은 그 낯선 자에게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 주고 떠나라고 간청한다. 그는 야곱을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말을 한다. "이제부터 너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건 바로 네가 하느님에게 대항하여 싸운 자라는 의미이다." 야곱은 다리를 절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지중해 동부 해안에 위치한 작은 지역으로, 짧지만 커다란 고통의 역사를 가진 국가인 이스라엘이다.

둘째, 오랜 고통의 역사를 가지고 전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바로 하느님께 대항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은 영적 성장 제1단계에 속한 사람들로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싸움을 시작하고,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완전한 어둠 속에 있으며, 커다란 고통이나 축복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상태의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의미는 한때는 고통을 받았고 또 한때는 축복을 받았던 영적 성장 제2단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근본주의 경향을 보이는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도 그리고 불교도들이다. 또한 두 번 고통을 받고 두 번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러시아, 영국, 아르헨티나 또는 미국에 살고 있는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세 번 고통 받고 세 번 축복을 받은 전 세계 모든 문화권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축복 뒤에 다가 올 미래의 고통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아직도 하느님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라는 전체 공동체가 가진 잠재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이다.

심리적·영적 그리고 역사적인 짐 우리는 항상 심리적이고 영적인 짐을 지고 다닌다. 때문에 우리의 삶과 하느님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심리적이고 영적인 짐은 흔히 형체도 없는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다. 이런 짐들 중 일부는 종교 재판처럼 극단적으로 치우친 종교심에서 나온 결과이다. 본래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통합된 하나였다. 이렇게 통합된 형태가 바로 철학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토머스 아퀴나스 등과 같은 초기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그들은 증거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여러 가지의 가설들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완전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633년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최악이었다. 이 종교 재판의 결과는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종교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고 있는 갈릴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강제로 갈릴레이가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게 만들고, 남은 일생 동안 그를 가택연금 시켜 버렸다.

3. 분류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오히려 상황은 더 좋지 않게 되었다. 이 엄청난 사건에 이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국가, 과학 그리고 종교 등의 영역을 구분하자는 성문화되지 않은 사회 계약설이 나타났다. 그것은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회의 필요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이었고, 그 이후 과학과 종교의 본질을 결정하는 데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 초, 아이작 뉴턴은 '자연 과학 지식 발전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 의장이었다. 그 당시 이미 자리는 잡았지만 성문 화않은 계약에 의거, 자연 과학 지식은 초자연 지식과 구별되었다. '자연 과학 지식'은 과학 영역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초자연 지식'은 이제 종교의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계약 규칙에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자연 과학 지식이 과학자들의 영역이 되고, 초자연 지식이 신학자들의 영역이 되어 버린 후, 불쌍한 철학자들의 몫은 그 틈새에 떨어져 남은 것들 뿐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성문화되지 않았던 이 사회 계약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지적 해프닝 중의 하나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으로부터 많은 긍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종교 재판이 서서히 사라졌으며, 마녀 화형 제도가 금지되었고, 교회의 귀중한 재산이 수세기 동안에 걸쳐 고스란히 보존되었으며, 노예 제도가 사라졌고, 무정부 상태에 이르지 않고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과학의 관심의 대상을 자연 현상으로만 국한시켰기 때문에, 과학이 급속히 발전하여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만큼 기술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우주 개발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성문화되지 않았던 이 사회 계약이 더 이상 효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 계약은 완전히 악마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악마적 diabol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던져서 깨트리다'. '분리시키다' 또는 '구획화하다' 등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allein'이다. 그 반대어는 '상징적 symbolic'이란 단어인데, 그 어원은 '같이 모으다. '통합하다' 등의 의미의 'symballein'이다. 이 성문화되지 않은 사회 계약은 모든 것을 조각조각 분리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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