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의 '과학'
결국 모든 것은 신을 향한다. 작가님은 앞에서 이 책은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 판사가 말했다고 추정되는 다음의 한 문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복잡성의 한 측면에 있는 단순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다른 측면에 있는 단순함을 위해서는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복잡성의 또 다른 측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확성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이라면 '신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사실들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확실함만을 강조하는 고지식한 입장에서는 신의 참된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사물을 인지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처럼 복잡성의 또 다른 측면은 언제나 획일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인생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미스터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지만, 변화와 치유와 지혜의 습득 과정을 포함한다.
이곳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매우 복잡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갑자기 모두 다 이해가 되어 버리는, 즉 직관적으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현현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물질이라는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처럼 우리가 복잡성이 가진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가야 되는 변화는 어렵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그 역설을 직면하고 이것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가졌던 과거의 낡은 생각들을 버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확신감의 결여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순간 무엇인가가 나타나서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이 여행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고 용감해져야 한다. 우리의 감성적 지적 그리고 영적 자원 등을 총동원하여 역설적 사고와 성실한 사고를 방해하는 모든 장벽을 헐어내는 데 수반되는 상실감을 견뎌 내야 한다.
한 가지 역설은 바로 다른 측면에 나타나는 단순함은 항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은 흔히 아주 복잡한 존재로 여겨진다. 기독교도로서 작가님은 하느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역설을 포용하는 동시에, 나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뜻이며 또 나는 그에 대한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 이제 '하느님의 이론'과 비록 대부분이 간접적이긴 하지만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적 증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 과학과 신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신의 계획에 과학은 어디쯤 그 설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카를 융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과학자들은 삶의 의미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진척시켰던 업적을 통해서 세계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두 거장들은 개인적으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어떠한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를 말할 수 없다.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주장에도 최소한의 회의주의는 항상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으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성의 시대에서 과학은 바로 신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신은 측정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며, 또 우리 손에 잡히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인가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것을 시도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측정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개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으로 인해 측량 행위 자체가 일종의 과학적 우상이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과학자들은 측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단순히 회의하는 것 이 아니라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관찰할 가치는 없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다.
여기엔 물론 신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을 손에 잡을 수도 측정할 수도 없다면, 분명히 실제 존재하는 빛, 중력, 원자의 입자 등을 완벽하게 측정할 수도 손에 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빛, 중력, 전자 기학 그리고 양자 역학과 같은 현상을 탐구함에 있어서 자연 과학은 지난 세기 동안 꾸준히 발전하여 이제는 어떤 수준에서는 실상이 완전히 역설임을 인정하는 수준에까지 왔다. 나는 아직 도가야 할 길에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우리는 가장 단순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직설적이고 확실한 자연 과학적 해답보다는 얼핏 보기에는 이상한 교리문답과 비슷한 대답을 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전자의 위치는 언제나 같은 곳인지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해야 한다. 만약 전자 위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느냐 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전자가 정지 상태인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 전자가 움직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은 사후 인간의 자아의 상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위와 같은 대답을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대답은 17~18세기 과학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익숙하지 않은 대답들이다.
그러나 '하느님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는 과학적인 현상과 수많은 우연한 일들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영적 활동에 대한 암시들은 많이 있다. 우리가 위대한 과학적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주 기원에 대한 '빅뱅 이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하느님을 향하며, 극히 일부만이 인간을 향한다. 단순히 하느님이 측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물질주의자들과 세속적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한다. 물질주의자들은 진실이란 오직 인간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뿐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모토는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이보다 더 복잡한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그 반대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서 간단히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신학자 마이클 노박이 성스러운 의식과 세속적 의식을 구분하면서 내린 분명한 정의이다.
세속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매우 지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수한 은하계 중 하나인 태양계의 일부인 중 간 크기의 행성(지구)의 표면에서 살아가고 있는 60억 세계 인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인간들 역시 자신과 똑같이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속적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지적인 인간일지는 모르지만,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쉽게 상실감을 경험하며, 스스로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종 생의 무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성스러운 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의 중심이 신성한 존재, 다시 말해 하느님에게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실 세속주의 자들보다 자신을 하찮은 존재이거나 무의미한 존재라고 덜 느낀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성스러운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중요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한 발은 성스러운 의식 속에 또 다른 한 발은 세속적인 의식에 담근 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더욱이 세속주의와 신앙주의에는 서로 다른 여러 유형들이 있다. 그러므로 신의 '과학'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물질주의자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고, 또 사람마다 하 느님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영성과 종교의 차이점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영성과 종교
작가님이 강연을 할 때, 대개의 청중들이 이 두 용어에 대해 혼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점차적으로 종교에 대한 정의를 한정시키게 되었는데, 그것은 특정한 신조를 가지며 그에 합당한 자격의 한계를 정하고 있는 믿음의 구성체이다. 영성은 보다 포괄적인 것이다.
작가님은 영성을 정의하기 위해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를 정의할 때 사용했던 표현을 인용했다. 제임스는 그의 저서인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서 종교란 "만물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라고 정의했다. 작가님은 이 말이 곧 영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생각하는 작가님은 개인적으로 우주를 지배하는 가시적인 질서 뒤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이 힘은 중립적이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힘과 조화를 이루어 가길 바란다고 믿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이기는 하나 영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 역도 가능하다.
작가님이 만난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 중에는 일 년간 작가님과 같이 일했던 수녀 사람이 있다. 그 수녀는 수녀원에서 25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고 오로지 수녀가 되기만을 원했다. 고해성사와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으로는 자신일상생활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작가님처럼 영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도 있다. 작가님은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아주 보편적인 사람이다. 작가님은 대체로 세속적인 환경에서 성장했고, 작가님의 영적인 발전은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들 때문에 가능했다. 작가님은 4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특정 종교와 관련 없이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다소 예외는 있지만 작가님은 진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고 있다. 작가님은 또한 다른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도 실천한다. 나는 어떤 보답을 할 수 있는가? 기독교적 경험의 영역은 작가님이 쓴 유일한 기독교 서적이고, 그 외의 다른 책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것이다.
종교적 또는 영적으로 적극 성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보통 임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계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작가님과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영성의 본질에 따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작가님은 그와 같은 변화가 일련의 단계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