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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돈의 심리학 <간절하면 믿게 되는 법이죠>

by 수호천사1009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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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허구와 스토리는 왜 통제보다 강력한가.

지구에 파견된 외계인이 있다. 그의 임무는 우리 경제를 예의주시하는 것인데, 뉴욕 상공을 배회하며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경제 규모와 변화를 평가하려고 한다.

2007년 새해 전야에 그는 타임스퀘어 상공을 맴돈다. 수만 명의 행복한 인파 주위로 휘황찬란한 조명, 거대한 광고판, TV 카메라들이 보인다. 2009년 새해 전야에 다시 타임스퀘어를 찾는다. 수만 명의 행복한 인파 주위로 휘황찬란한 조명, 거대 한 광고판, TV 카메라들이 보인다. 똑같아 보인다. 그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뉴욕 곳곳에 거의 같은 수의 인파가 떠밀려 가고 떠밀려 온다. 그들 주위의 빌딩도 같은 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책상도, 컴퓨터도 같은 수고, 연결된 인터넷도 같은 수다. 도시 밖에서는 같은 수의 공장과 창고가 똑같은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같은 수의 트럭들이 달리고 있다. 땅으로 좀 더 가까이 내려와 보니 같은 수의 대학에서 같은 주제를 가르치며 같은 수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학위를 나눠주고 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특허도 같은 수다.

그는 기술이 발전한 것을 눈치챈다. 2009년에 모든 사람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2007년에는 없었다. 컴퓨터도 좀 더 빨라졌다. 의술도 더 좋아졌다. 자동차 연비도 개선됐다. 태양광 기술과 수압파쇄 기술도 발전했다. 소셜미디어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나라 곳곳을 비행해도 같은 것이 보인다. 지구 곳곳을 비행해도 역시나 똑같다. 경제는 거의 같은 형편이고, 어쩌면 2009년이 2007년 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다가 숫자를 살펴본다. 2009년 미국의 가계가 2007년보다 16조 달러나 가난해졌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미국의 실업자가 1,000만 명이나 늘어난 사실을 접하고 입이 떡 벌어진다. 설마 하고 의심하던 찰나, 주식시장의 가치가 2년 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제 잠재력에 대한 사람 들의 예측이 이처럼 곤두박질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가 말한다. "도시들도 봤고, 공장들도 봤어. 당신들은 똑같은 지식, 똑같은 도구,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그런데 왜 더 가난해진 거야? 왜 더 비관적이 된 거야?"

2007년과 2009년 사이에 외계인이 볼 수 없었던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경제에 관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2007년 우리는 주택가격 안정과 은행가들의 신중함, 금융시장의 정확한 리스크 평가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세상의 모든 차이를 낳았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할 거라는 내러티브가 한 번 깨지자 주택담보대출 미상환율이 상승했고, 은행은 돈을 잃었으며, 다른 사업체에 빌려주는 대출금을 줄였다. 이는 정리 해고로 이어졌고, 그러자 소비가 줄었고, 이는 다시 더 많은 해고로 이어졌다. 새로운 내러티브를 고수한다는 점 외에, 2009년의 부와 성장 여력은 2007년과 똑같거나 아니면 더 컸다. 그런데도 경제는 80년 만에 최악의 타격을 받았다. 이는 예컨대 1945년 독일과는 다른 상황이다. 당시 독일은 제조 기반이 깡그리 사라졌다. 2000년대 일본과도 달랐다. 당시 일본은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경제적 손실이다. 2009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러티브 손실을 입혔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힘 중 하나였다.

경제나 사업, 투자, 커리어의 성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는 다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힘을 경제에 미친다. 스토리는 경제의 유형적 부분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연료, 내지는 우리의 능력을 억제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스토리가 좌우하는 세상에서 개인이 돈을 관리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무언가가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랄수록

그게 사실일 확률을 과대평가하는 스토리를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인가? 다큐멘터리 <영원히 사는 법 How to Live Forever>에서 100살이 넘은 부인에게 무심코 이런 질문을 하자, 그녀는 놀라운 답을 내놓는다.

 

"휴전 기념일이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휴전 협정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왜요?" 프로듀서가 물었다. "다시는 전쟁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21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7,500만 명이 죽었다.

인생에는 우리가 사실이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사실이라 믿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매력적인 허구'라고 부른다. 매력적인 허구는 우리가 돈을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투자와 경제에 관해서 말이다.

당신은 똑똑하다. 해결책을 찾고 싶다. 하지만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고, 중대한 사안이 걸려 있다. 바로 이럴 때 매력적인 허구가 발생한다. 매력적인 허구는 아주 강력해서 거의 아무것이나 믿게 만든다.

간단한 예를 하나 보자. 알리 하자지라는 사람의 아들이 아팠다. 예멘인들이 모여 사는 그의 동네 어른들이 민간요법을 하나 제안했다. 아들의 가슴에 불타는 꼬챙이 끝을 밀어 넣어 병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자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쓴 후 하자지는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은 없고 아들이 아프면 뭐라도 믿게 되죠.'

제대로 된 의료기술이 나오기 수천 년 전부터 다양한 치료법이 있었다. 세균이 발견되고 과학적 방법이 나오기 전에는 피 뽑기, 굶기기, 몸에 구멍을 뚫어서 악마를 빼내기 등 아무 효과는 없고 죽음을 재촉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했다. 미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간절히 필요한데 좋은 해결책이 보이지 않거나 이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은 하자지의 추론을 따르는 것이다. '아무거라도 믿어보는 것 그저 아무거나 시도하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다.

런던 대역병의 연대기를 썼던 영국의 소설가 대니얼 디포 Daniel Defoe는 172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예언과 점성술적 주술, 어리석은 미신에 중독됐다. (중략) 달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중략) 주택의 기둥과 거리 모퉁이에는 자신에게 치료책이 있다고, 자신을 찾아오라는 의사나 무식한 자들의 광고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 전단은 보통 다음과 같은 과장된 문구로 시작했다. '틀림없는 역병 예방약 '감염을 막아주 는 확실한 보존제 '공기 오염을 막아주는 특효 약물'

역병으로 18개월 만에 런던 시민의 4분의 1이 죽었다. 이 정도로 큰 위험이라면 뭐라도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똑같이 정보가 제한적이고 중대한 사안이 걸렸을 때, 우리의 금융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생각해 보자.

 

별로 성공한 이력도 없는 TV 투자 해설에 사람들은 왜 귀를 기울이는 걸까? 투자에 걸린 것이 워낙 큰 이유도 일부 있다. 주식 몇 가지만 잘 고르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예측이 현실이 될 확률이 1퍼센트만 있더라도 그리고 그게 실현될 경우 내 인생이 바뀐다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금융에 관한 의견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따라서 어느 한 전략을 택하거나 어느 한쪽 편을 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금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쪽 편에 서서 투자하게 된다. 어느 주식이 10배 오르기를 바란다면, 그쪽이 당신이 택한 무리다. 어느 경제정책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고 생각하면, 그게 당신이 편든 쪽이다.

이런 것들은 확률이 낮은 도박일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1퍼센트처럼 낮은 확률은 조정할 수도 없고, 조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가 사실이길 바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현실이 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는 매일 극단적 보상의 기회가 주어지는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다. 사람들은 돌팔이 날씨 예보관은 믿지 않으면서 돌팔이 금융가는 믿는다. 다음 주에 주식시장이 어떨지 정확히 예측한 데 따른 보상은 다음 주에 햇빛이 날지, 비가 올지 예측한 데 대한 보상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2018년까지 10년 동안 적극적인 운용 전략을 펼친 뮤추얼펀 드의 85퍼센트가 벤치마크보다 낮은 성적을 냈다. 보통은 이 처럼 낮은 성적을 내는 업계는 틈새시장이며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펀드에 투자된 금액은 거의 5조 달러에 이른다. '제2의 워런 버핏'을 따라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열렬한 믿음을 가질 테고 수백만 명이 평생 모은 돈을 쏟아부을 것이다.

아니면 버니 매도프를 떠올려보자. 뒤돌아보면 그의 폰지 사기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그는 매번 똑같은 수익률을 보고했고, 감사를 받는 회계회사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으며, 어떻게 그런 수익률을 냈는지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매도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박식한 투자자들에게서 수십억 달러를 모집했다. 그는 멋진 이야기를 들려줬고, 사람들은 믿고 싶어 했다. 이 점이 바로 실수의 여지에 대한 대비, 유연성, 경제적 독립성(앞서 논의한 중요한 테마들)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사실이길 바라는 것'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실이어 야만 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크면 '금융 분야의 매력적인 허구'로 인한 피해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예측을 하면서 실수의 여지를 가늠할 때조차 우리는 바란다. 잠재적 결과의 범위가 '내가 옳은 것'과 '내가 아주아주 옳은 것' 사이에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무언가가 사실이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란 나머지, 예측 범위가 현실과 아주 동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2007년 마지막 회의에서 2008 년과 2009년의 경제성장률에 대한 예측을 내놓았다. 경제 약화에 지칠 대로 지친 이사회는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사회는 잠재성장률 범위를 1.6퍼센트에서 2.8퍼센트 사이로 예측했다. 말하자면 이게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안전마진, 실수할 수 있는 여지였다. 현실에서 미국 경제는 2퍼센트 이상 쪼그라들었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추정치 하한을 오차 범위보다 거의 세 배나 벗어났다는 뜻이다.

정책 입안자들이 대놓고 경기침체를 예언하기는 쉽지 않다. 경기침체는 본인들의 커리어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악의 예상도 성장이 '더디다' 수준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허구이고 믿기 쉬운 예언이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을 예상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책 입안자들을 손쉽게 비난하긴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양방향으로 일어난다. 경기침체가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미리 주식을 현금으로 바꿨다면, 경제에 대한 당신의 시각은 당신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일 때문에 갑자기 왜곡될 것이다. 사소한 소동이나 목격담 하나도 마침내 올 게 왔다는 신호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래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걸 바라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는 강력한 동인이다. 나의 금융 목표 및 전망에 이런 것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금융에서 실수의 여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중대한 것이 걸려 있을수록, 실수의 여지도 크게 잡아야 한다.

세상에 대한 관점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우리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딸은 한 살 정도 되었다.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엄청나게 학습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우리 딸 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생각해 본다.

딸은 아침마다 아빠가 왜 일하러 가는지 이유를 모른다. 청구서, 가계, 커리어, 승진, 은퇴 준비 같은 것은 딸에게 완전히 낯선 개념이다. 딸에게 연방준비제도, 신용파생상품, 북미자유무역협정 같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딸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딸은 어리둥절한 채로 헤매고 다니지 않는다. 비록 한 살에 불과하지만 세상 원리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담요는 따뜻하고, 엄마가 붙잡는 것은 위험해서이고, 대추야자는 달다.

딸이 마주치는 모든 것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성한 수십 가지 모형 중 하나에 딱 맞아 떨어진다. 내가 출근할 때 딸은 '월급이 뭐야? 청구서가 뭐야?' 하면서 나를 붙잡는 게 아니다. 딸은 이 상황에 대해 아주 명확한 설명을 갖고 있다. '아빠는 나랑 놀아주지 않을 거고, 나는 아빠가 놀아주길 바랐기 때문에, 지금 나는 슬프다.'

딸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일관된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몇 살이든 우리는 이와 똑같이 하고 있다. 딸과 마찬 가지로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따라서 나 역시 내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머릿속의 한정된 모형을 가지고 세상을 설명한다. 딸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딸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중 많은 것들을 틀린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 원리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이는 팩트 fact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주제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 역사란 이미 있었던 일을 되짚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명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로부터 배우기 why Don't We Learn From History?)에서 B. H. 리들 하트. H. Liddell Har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는) 상상력이나 직관의 도움 없이는 해석될 수 없다. 너무나 압도적인 양의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선별은 불가피하다. 선별도 하나의 기술이다. 역사를 읽는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해 줄 내용을 찾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충성심을 옹호한다. 단언 혹은 공격의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읽는다. 불편한 진실에는 저항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정의의 편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나고 보면 과거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치 세상이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우리는 세상이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이해가 된다고 착각한다. 이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 실수가 생기니 큰일이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주치면 보통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나만의 시각과 세상 경험을 바탕으로, 그 경험이 아무리 제한적이라고 해도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복잡한 세상이 이해가 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실상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는 구멍들을 채워줄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그런 스토리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경제적인 영향은 환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끔찍할 수도 있다.

세상의 원리에는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주식시장이 왜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지 내가 완전히 오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다음번에 주식시장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내가 알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다. 주식시장과 경제를 예측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에는, 세상이 당신 생각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당신 밖에 없는 탓도 있다. 당신이 의사결정을 내린 이유를 나는 이해 조차 할 수 없고, 내가 맹목적으로 당신을 따라 할 경우 해당 의사결정은 당신에게는 맞는 것이어도 나에게는 참사가 될 수 있다. 16장에서 보았듯이 바로 이런 식으로 거품이 형성된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시장예측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예측은 아주, 아주 형편없다. 한 번은 내가 계산해 본 적이 있는데, 시장이 매년 역대 평균만큼씩 상승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월스트리트 대형은행의 최고 시장전략가 20인의 연간전망 평균을 따르는 것보다 더 정확했다. 경기침체를 예측하는 능력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대형 사건은 느닷없이 터지기 때문에 예측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칠지 모른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결과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대해 예측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칼 리처즈 Carl Richards는 이렇게 쓰고 있다. "리스크란 내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했다고 여길 때 남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내가 만난 투자자 중에서 진심으로 전체적인 시장예측이 정확하다거나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나 재무상담가들이나 할 것 없이, 아직도 예측에 대한 수요는 어마어마하다. 이유가 뭘까?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 Philip Tetlock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내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권위 있게 들리는 사람들에게 의지한다."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말은 훌륭한 표현이다. 내가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계산하고 해결해야 할 분석적인 문제가 아니라, 누가 긁어주어야 할 정서적 가려움증 같은 것이다.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불확실하다는 현실보다 오히려 설득력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스토리에 집착한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정확성의 영역과 불확실 성의 영역을 혼동하는 탓도 있다. 미국항공우주국 NASA에서 발사한 뉴호라이즌스 우주선이 2015년에 명왕성을 지나쳤다. 9년 반 동안 48억 킬로미터를 움직인 여정이었다. NASA에 따르면 "2006년 1월 발사했을 때 예측한 것보다 1분가량 덜 걸렸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테스트해 본 적도 없고 10년이 걸리는 여정에서 NASA는 99.99998퍼센트의 정확성을 보였다. 이는 마치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가는 데 100만 분의 4초밖에 틀리지 않은 예측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은 정확성의 영역이다. 인간의 행동, 감정 같은 예측 불허의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금융과는 다르다. 비즈니스, 경제, 투자는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이런 것들은 깔끔한 공식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의사결정에 압도적으로 좌우된다. 명왕성으로 가는 여정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비즈니스나 경제, 투자가 명왕성으로 가는 여정과 같기를 간절히 바란다. NASA의 엔지니어가 결과를 99.99998퍼센트 통제하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근사하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다른 부분, 예컨대 돈 문제 같은 영역에서도 꽤 많은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스토리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카너먼은 그런 스토리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고 했다.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내 결과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의사 결정을 내리게 될 남들의 계획이나 능력은 소홀히 한다.

• 과거를 설명할 때도, 미래를 예측할 때도 우리는 인과관계에 미치는 능력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운의 역할은 소홀히 한다.

·우리는 내가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모르는 것은 소홀히 한다. 그래서 나의 믿음에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카너면은 이것이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설립자 및 참여자들에게 여러 차례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이 일의 결과를 어느 정도나 좌우할까요?" 분명히 쉬운 질문이다. 답은 금방 나왔고, 그 답이 80퍼센트 이하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회사가 성공할지 확신하지 못할 때조차 이 대담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틀렸다. 스타트업의 결과는 자신들의 노력 못지않게 경쟁자의 실적과 시장의 변화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사업가들은 자연히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나의 계획, 행동, 자금 모집 가능성 같은 가장 직접적인 위협과 기회 같은 것들 말이다. 경쟁자에 대해서는 이만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큰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그렇게 하고 산다. 그리고 내 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눈을 감고 어리둥절한 채로 헤매고 다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내가 우연히 아는 것들을 기초로, 내가 활동하는 세상이 이해가 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침대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지구 위를 배회하던 그 외계인은 어떨까? 눈에 보이는 것을 기초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안다고 확신했으나, 남들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를 알 수 없었기에 완전히 틀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외계인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 외계인이다.

 

우리는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권위 있게 들리는 사람들에게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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