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정 신학
세속주의자이든 영적인 사람이든 관계없이 우리 대부분은 세상에 왜 그처럼 많은 고통과 고난과 악 등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왜 세상은 완벽하지 않은가? 그 질문에 대해 '신의 방식은 신비스러운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없다.
그러나 작가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되었고 전통적이며 적절하지 못한 '신의 이론'에 상대적으로 보다 현대적이고, 명상적인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원시적인 신의 이론은 하느님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신에 대한 그와 같은 단순한 관점은 악을 설명하지 못했고 성경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했다. 성경의 창세기 3장에 따르면 태초에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했지만(이것 또한 의문시되는데) 문제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완벽한 삶의 터전인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면서, 지금부터 그들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왜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정말 하느님은 사디스트인가? 작가님은 하느님 스스로가 만든 제약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 안에서 모든 일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유 의지를 주면서 그의 뒤에 총을 들이밀 수는 없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자유롭다는 뜻이고, 우리가 자유롭게 선이든 악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순간에, 이미 선뿐만 아니라 악도 이 세상에 던져졌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하느님은 더 이상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구속하셨고, 그로 인해 하느님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하느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이런 하느님의 구속적인 결정은 죽음(암시적으로 질병과 노화)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저주'로 인해 인간은 얼 마나 고통받아 왔는가!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반드시 영혼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한, 노화와 질병과 죽음 등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작가님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저주하지만, 내가 보다 이성적일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하느님이 세운 자연 질서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님은 하느님이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은 결코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질병, 노화, 죽음 그리고 육체적 파멸 등과 같은 자연 질서의 한계 내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인간의 악도 허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 안에 있다.
하느님이 단순히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 행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초기 신학 이론에 대한 첨언적인 내용이 아니다. 초기 신학만큼 중요성을 지닌 새로운 이론이 지난 50여 년간 걸쳐 생성되어 과정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것은 하느님이 정적이고 절대 불변의 존재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느님 역시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바로 우리 옆에서 살아 있고, 고통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하느님은 우리보다 한두 발자국 앞서 있는 존재일 뿐이다. 과정 신학의 기원은 20세기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이지만, 사실 100여 년 전의 모르몬교 교리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모르몬교 교도들에게는 오랫동안 이런 문구가 전해져 온다.
"현재의 인간은 하느님의 과거의 모습이다. 현재의 하느님은 미래의 인간의 모습이다." 지상에서처럼 천국에서 나는 과정 신학에 대해서 일종의 새로운 이론을 첨가했는데, 창조는(영혼, 인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의 창조를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실험이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창조주라면, 상상력이 풍부하고 정 교하며 예술적이겠지만, 인간 세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역시 실험가일 뿐이지 않겠는가?
과학자들은 대체로 많은 실험들이 '실패' 한다는 사실에 별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실험은 그저 시도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향상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은 영혼 심지어는 사악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실패한 실험'쯤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성공한 실험만큼 실패한 실험에서도 배울 것은 많다. 실험에 실패하면 우리는 다시 계획 단계로 돌아간다. 아마 하느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느님을 전지전능하고 절대 불변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과정 신학의 본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새로 태어나려 하는 세계에서 나는 내가 처음으로 과정 신학의 개념에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2. 살 빼기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로, 35세의 환자와 함께 진료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으로, 아마도 그녀 연령과 신장 대비 표준 체중에서 많아야 8킬로 정도를 초과한 체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전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열렸던 즐거운 파티에서 긴장이 풀린 나머지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먹었다. 그녀는 곧 후회를 했다.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시작한 지 6일 만에 살 빼는 계획을 깨트리다니! 이제부터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이렇게 의지가 약한 내가 너무 싫어. 맙소사. 아이스크림이라니! 버터스카치 소스. 그 걸쭉하고 끈적한 소스 같은 칼로리 높은 음식을 주문해서는 안 되는데, 요즘, 난....... 그녀가 그런 상태에서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 작가님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만 몸무게가 표준 체중에서 조금 더 나갈 뿐인데 왜 저 여성은 저렇게 몸무게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는 갑자기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살 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마치 내가 미친 게 아니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작가님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환자는 충분한 살 빼기를 하거나, 적절한 살 빼는 요법을 찾아내거나, 충분한 심리 치료만 받는다면, 단 1킬로도 살이 찌지 않고 원하는걸 무엇이든 먹을 수 있거나 아니면 살이 찌더라도 아무런 노력 없이 즉시 늘어난 몸무게를 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상상이 떠올랐다.
"어쩌면 하느님은 5킬로가 늘었을지 몰라요. 그만큼의 몸무게를 줄여야 하지만,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야단법석을 떨지 않을 뿐이지요." 그 환자를 고민에 빠지게 했던 착각은 완전함에 대한 고정된 개념이다.
완전함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부정적인 개념이다. 그런 생각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엇인가 완전한 것이 변한다면 완전했던 과거와는 다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만약 과거와는 다른 무엇이라면, 불완전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진정으로 완전한 것이라면, 정의상 불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완전함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학자들도 점차적으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생명체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이다. 생물과 무생 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반응성이다. 어떤 대상을 쿡 찔렀을 때, 반응을 보이고 움직인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생명체는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고, 성장하고, 죽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작가님은 살아 있는 하느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작가님의 하느님 역시 변화하고 배우고 성장하고, 어쩌면 춤을 추고 웃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유토피아
과정 신학이 표방하는 이 새로운 개념은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완전함이라는 퍼즐에 큰 조각 하나를 맞추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것은 좋다는 주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조직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다 건강할수록. 우리는 보다 더 '변화해 가는 과정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더 활발하게 살아갈수록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보다 더 완전함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더 빨리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해 감에 따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과 사회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이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변화와 소란스러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의식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온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해 남아 있는 인생 동안에 그 관계를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나 조직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멸 단계에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 다. 만약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이 고통을 받고 있거나, 고전을 하고 있거나,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거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이나 조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적인 현상과 조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모든 존재가 완전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유토피아라는 것이 결코 변하지 않는 세계는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유토피아의 개념은 변화해 갈 것이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토피아에 도달하는 순간 이미 유토피아는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변화와 발전에 수반하는 고통과 어려움이 없는 상태는 결코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경쾌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토피아는 최대의 생명력을 향하여 최대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사회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은총을 베풀 여지가 있는 한, 유토피아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정된 이해력으로 완전함이란 절대 불변이라는 전통적 시각에 얽매여 있는 한, 그것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언제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도달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미미하기는 하지만 유토피아에서의 보다 희망찬 날들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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