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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그리고 저 너머에

by 수호천사1009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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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

모든 사람은 기도를 한다. 철저한 세속주의자들도 고통이나 환희의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를 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희열을 느낄 때, '오, 신'이라고 외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독감에 걸려서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도, 그들은 '오, 신' 하고 신음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피난처에서 무신론자는 없다'라는 말처럼, 공포의 순간에도 그들은 신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세속주의자들과 종교적 또는 영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한 가지 차이점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고통이나 환희에 빠져 있지 않은 시간 중에도 그 99.5퍼센트를 신을 생각하는 데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란 무엇인가? 작가님은 우리의 삶 속에는 의식, 공동체, 사랑, 영혼 등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이 신과 연관되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너무나 큰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의 관점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학자들이라면 기도에 대한 적절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도란 단순히 '신께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신께 말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기 때문에 이런 정의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단체 기도와 개인 기도. 공식 기도와 비공식 기도 찬양과 경배 그리고 감사의 기도, 참회와 용서의 기도, 타인 또는 자신을 위한 청원의 기도 등이다. 나는 명상 역시 기도라고 분류하고 싶다. 명상에도 여러 가지의 유형이 있다.

모든 종류의 기도와 명상이 다 '자신을 비우기'라고 정의될 수는 없겠지만, 작가님은 최선의 명상은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침묵시키며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신이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답하 신다는 뜻은 아니다.

영적인 경험들은 기도하고 있을 때 나타나지 않을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은 적극적인 기도 생활을 하면 언젠가는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될 인식하게 될 가능성은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기도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훌륭한 생각은 기도로 발전되어 갈 수 있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기도의 정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는 신이란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 매튜 폭스가 내린 정의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폭스는 기도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기도를 할 때마다 신께 말하거나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작가님은 인생의 미스터리에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나는 우선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내 자신의 삶의 미스터리와 그런 것들에 대응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신, 이 문제가 당신에게는... 당신의 눈을 통해서 는 어떻게 보이는지요?"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흔히 묵상기도라고 한다. 그리고 대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폭스의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기도란 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명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잘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상적인 기도에는 대단히 좋은 점이 많다. 작가님은 기독교 인이지만, 다른 모든 위대한 종교에는 기독교가 갖고 있지 못한 중요한 진실도 있고, 그것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작가님이 읽었던 이슬람교의 성전에는 아주 빈번히 기억하라'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마을에 탑들을 세우고 충실한 신도들에게 하루에 다섯 번 소리쳐서 기도할 시간임을 상기시키고 또 기도를 함으로써 신을 기억하라고 일깨우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의 수도승들이나 수녀들이 하는 고차원적인 명상을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고 실천한다. 대중적인 기도와 공식적 기도 모두 대단한 장점이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기도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하는 기도이다. 그런 기도는 보다 더 개인적일수록 신이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양방향 도로와 같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인 것이 되려면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제외하고) 적어도 저 건너편에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이것은 믿음과 기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한다. 왜 건너편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가?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에 대한 갚음을 한다." 이 인용문에서 볼테르는 하느님을 육신을 갖춘 남자 또는 여자로 의인화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모습과는 좀 다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작가님은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게 인간이 가진 최선의 특성을 투사해 보는 것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가장 인간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2. 믿음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알게 된 또 다른 것들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기도에 앞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기도를 많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작가님은 라틴어로 쓰여져 있는 책에서 오래된 기독교 모토 인 '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 뜻은 '기도의 규칙은 신앙의 규칙을 앞선다'라는 뜻이다. 작가님은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믿음이 깊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왜 믿음 속에서 성장해야 하는가? 어렸을 때 작가님은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더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한 성자의 말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당신이 믿음을 가진 자라는 이해를 구하려 하지 말고, 이해를 하고 있는 자라는 믿음을 구하라." 나는 그와 같은 '과학' 지식이 점차 쌓이게 되어서 작가님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 애니라는 아주 아름답지만 세속적이었던 한 여성을 도와줄 수 있었다. 애니는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가진 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부재였다. 작가님은 그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난 후, 애니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런 일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기도의 상당 부분은- 내 생각엔 성경 어디엔가 있는 문장인데

'하느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의 이 믿지 못하는 마음을 도와주세요'거든요. 정말 한심하죠." "애니. 그 기도는 당신이 지금까지 했던 기도 중에서 가장 멋진 기도예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이 여성의 믿음의 성장 속도는 아주 느렸지만(영적 성장 제3단계에서 제4단계로 올라가는 과정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때로는 눈이 번쩍 뜨이듯이 믿음의 발전 속도가 아주 빠르기도 했다.

사실 그런 경험은 놀랄 만한 것이다. 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러 오는 대부분의 청중들은 영적 성장의 제3단계에서 제4단계로 이동하고 있거나, 이미 제4단계에 도달한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작가님은 흔히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여기 오신 분들 중 영적 성장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혹시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들은 대부분 내 질문에 수긍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러면 작가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게 바로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란 여러분이 미쳐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질병의 결과로 갑자기 믿음이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련된 방법으로 확신을 주는 것이다(이런 일은 대부분의 세속적인 정신과 의사나 심리 치료사는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작가님은 지금까지 믿음의 성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 반대인 믿음의 상실은 무엇일까? 이것은 영적 성장 제2단계에 서 제3단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최근에 설립된 소규모 단체인 '근본주의자협회'는 아주 분명하고 엄격하며 교조주의적인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것을 포기하려 할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을 풀어 주기 위해 만들 어진 자립 단체이다.

믿음의 상실은 특히 전문적인 성직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적 성장 제2단계에서 목사직을 시작했던 많은 성직자들은 제3단계까지 발전을 했으나, 일요일마다 설교단에 서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 또한 파울러가 '믿음의 발달'이라고 불렀던 단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세련된 확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3. 시험

이제 위기의 순간에 어떤 종교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현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항상 위기는 있는 것이고, 믿음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다시 회복된다. 그러나 또 다른 유형의 시험이 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제4 단계에 있었던 매우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또 예측 가능한 형태이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16세기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하느님이 아주 오랫동안 내 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에겐 자신이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진 듯하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주었던 꿈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이것은 위기나 고통의 문제는 아니다. 한때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항상 곁에 있었던 하느님이 휴가를 떠나 버려서, 어쩌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분께 다가가 지 못하도록 할까? 성숙한 믿음이란 언제나 시험에 빠지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어떤 보답을 할 수 있는가? 에서

작가님은 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비유를 하면서, 그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엄마가 항상 옆에 있어 주고 보살펴 준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이는 매우 놀라고 엄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아이의 믿음이 수년간에 걸쳐 시험받으면서, 아이는 점차 엄마에게는 신경을 써야 할 다른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는 어쩌면 다른 방에서 자신의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거나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돌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에 도달하게 될 무렵에도 분명히 믿음이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믿음을 유지한다.

그들은 욥이 그러했듯이 우리 눈에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한다. 그들의 모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는 것 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외쳐 부르고 기도한 대상은 여전히 하느님이었다. 순교자가 아니었던 유명한 성인들 중 일부도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전 어두운 밤 속에서 그들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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