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아
여러 가지 면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자아와 영혼 사이의 싸움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앞서 작가님은 영혼의 정의를 '신이 창조하고, 신이 양육하신 독특하고도 발전 가능한 불멸의 인간 정신'이라고 했다. 이 정의에서 사용된 하나하나의 수식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은 '신에 의해 양육되었다'라는 부분인데 이 의미는 신은 우리가 자궁에서 잉태되는 순간에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은총을 통하여 우리를 평생 양육하신다는 뜻이다.
신이 그렇게 하시는 데는 우리에게 바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혼과 자이는 어떻게 다른가? 작가님은 앞에서 자아는 우리 성격을 지배하는 한 부분이라고 했다. 자아의 발달은 이 지배자가 성숙되어 가는 것 의식의 발달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아 이미지. 자아 인식 그리고 의지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성격 특성뿐만 아니라(흔히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특성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인생의 가치를 모두 포함한다. 영혼처럼 우리의 자아는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과 자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아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또는 우리가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 이미지의 껍질에 가까운 반면, 영혼은 더 깊이 내려가 존 재의 핵심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작가님이 2년 반 동안 다녔던 예비 학교 엑시터를 자퇴하겠다고 결심했던 때의 경우와 같다. 작가님은 이 이야기를 앞장에서 설명했다. 이 결정은 내 영혼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정체성이 있다. 이 '나'는 때로는 자아를, 때로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나의 자이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학교 생활을 참고 견뎌서 엑시터를 졸업한 형의 뒤를 따르기를 원했다. 나 역시 엑시터에 입학하길 원했고 학교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길 원했다. 나는 분명히 자퇴 학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자퇴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할 것인가? 점차로 나는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할 능력도 없고 또한 할 의욕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어릴 때부터 앵글로색슨계 백인의 신교도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단순히 나의 자아가 갈등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나의 자아가 진정한 자신과 충돌하여, 그 진정한 자신의 존재가 자아보다 커지고 깊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작가님은 후자의 설명을 수용 할 수 있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러면 '참된 자신'이란 무엇인가? 왜 이것은 정의될 수 없는가? 그것은 영혼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정의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영혼의 정의는 어떻게 될까? 세속적인 정신과 의사들은 진정한 자신 완전한 자신이란 여러 가지 심리적 요소들인 이드, 자아 그리고 초자아 의식과 무의식, 유전적으로 결정된 기질과 경험 등을 통해 축적된 학습의 결합체라고 말할 것이다.
나에게 그처럼 많은 요소들이 있으니 내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서로 충돌할 수 있다. 더욱이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는 이런 '결합' 모델을 사용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는 엑시터 재학 당시에 나는 내 스스로가 이런 여러 가지 요소의 집합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내 속에 있는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의 개별적 실체를 더 많이 인식할 수 있었지만, 결합체라는 느낌은 적었다. 나는 나 자신을 실제보다 거대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 심오하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2. 영혼
영혼과 자아는 서로 다른 현상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영혼과 자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상호 작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영혼의 변화와 성장은 자아가 움직이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 줄 것이며, 자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아 학습은 영혼의 발달을 촉진 시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자아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세속주의자들은 개인의 독자성은 인정하지만. 영혼과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스러운 차이를 구분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과 유전적 요소를 저마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의 자아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작가님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영혼은 독자성을 가지지만 자아에는 비교적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작가님은 자아에 대해선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지만, 영혼에 대해선 별로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자이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언어로 묘사할 수 있지만, 영혼의 독특 함은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영혼은 한 개인의 참된 정신이고, 신처럼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힘든 대상이다.
영혼의 독특함은 우리가 남은 인생 동안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길을 진지하게 선택했을 때마다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신 병리학적으로 자아는 진흙과 같아서, 깨끗이 씻어 없애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밑에 있는 영혼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영광스러운 빛으로 광채를 된다.
작가님은 신이 인간의 영혼을 사람마다 다르게 창조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것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란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비스럽다 하더라도 영혼 창조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개개인의 독자성은 부정할 수 없으며(여러분의 영혼에 위험이 닥쳤을 때를 제외하고) 단순히 심리학이나 생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영혼을 부정하려는 세속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감성 또 한 부정한다. 세속주의 속에는 자기 성취의 욕구가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그 어떠한 증거도 믿지 않겠다."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이 인간의 감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감정과 사고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흔히 자신의 감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마음의 할례
《아직도 가야 할 길》에 나오는 데오도르의 경우가 좋은 예로 치료 과정에서 작가님은 그에게 닐 다이아몬드가 작곡한 갈매 기의 꿈의 배경 음악을 들어 보라고 말했다. 이 곡은 아주 영적 이어서, 작가님은 그가 이 음악을 듣고 영적 성장의 길로 들어서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 음악이 역겨울 정도로 감상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곧 그 당시 그가 자신의 감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작가님은 영혼에 감동을 주는 노래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에 대해 똑같은 경험을 하거나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느 정도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여지는 남겨둘 것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가질 것이다. 영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과 가슴을 전체적으로 통합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여리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상황에 밀려 냉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때를 걱정한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남성과 여성들에게 머리와 가슴, 지성과 감성의 분리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마음속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동시에 지적으로는 무신론자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너그럽고 신사다우며 정직하고 동료들에게 헌신적인데 자주 절망감에 빠지고, 삶에 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며, 가슴속에서 나오는 흥겹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부정하며, 그들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유치하다고 치부해 버린다.
깊숙하게 내재된 자아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불필요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도 있는 치료는 마음속에서가 아니라, 가슴 또는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슴이 굳어져 버리면. 어떠한 말로도 그것을 뚫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구약 성서의 유대인들이 '마음의 할례'라고 부른 것을 겪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치유적 존재로서의 신의 실체를 받아들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