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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그리고 저 너머에

by 수호천사1009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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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시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신에게 다가가길 피하고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총이 가지는 놀라운 치유력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발현한다고 작가님은 믿고 있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거기에는 언제나 신의 손길이 스쳐간 것이다.

신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거나 또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는가?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신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당신은 내 친구인 삼십 대의 어느 여성이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조깅을 했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조깅을 할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깅을 하라고 말하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무시해 버릴 수 없었다. 그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한 결과를 며칠 후 내게 얘기하며 그녀는 희열에 차서 이렇게 외쳤다.

"전 우주의 창조자가 틈을 내어 나와 같이 달려 주었다는 걸 생각만 해보라고!"

내가 가장 최근에 신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듣게 된 때는 나의 소설 지상에서처럼 천국에서의 초고를 마치고, 출판사로부터 출간 수락을 받은 직후인 1995년 이른 가을이었다. 이 소설을 수정하는 동안 문제가 생겼다. 초고에서는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지만 2차 수정을 하면서 이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수정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내 자신에게서 한발 빠져 나와서 다른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더욱이 소설의 구성상 주인공은 나와 아주 비슷한 남자여야 했다. 즉, 정신과 의사이고 지적인 인물이며 아마추어 신학자여야 했다. 이건 정말 큰 문제였고,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이 문제는 뒷전으로 미룬 채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다니엘서를 읽어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다니엘서가 구약 성서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은 어떤 이유로 사자 우리에 던져졌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예언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알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다니엘서를 읽은 적이 없다. 그리고 다니엘서를 읽을 생각도 전혀 없었는데. 왜 그 목소리가 나에게 그것을 읽으라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보고는 다시 편지 쓰는 일을 계속했다.

다음 날 오후 아내의 사무실에서 몇 가지 논문들을 찾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니엘서를 읽어라"라고 이번에는 머리는 흔들지 않았다. 신의 권능을 경험한 적이 있는 작가님은 신이 나를 어디엔가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에 산책을 하고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스캇, 넌 언제 다니엘서를 읽을 거냐?"라고 그 목소리는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꺼내 다니엘서를 읽었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동안 내게 가장 유용했던 것은 바로 다니엘과 나 자신이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니엘은 나보다 용기가 있고 신앙심이 깊고 고상한 인물이었다. 또한 다니엘은 분명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해몽가로서 일종의 정신과 의사와 같았고, 나중에는 예언자로서 신학자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내가 살아온 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나는 곧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즉, 내 소설의 주인공은 스캇이 아니라 다니엘이 되어야 했다. 우리 둘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서 나는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주인공을 현실 속의 인물인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신이 나를 보살피신다는 이 예는 내가 학자로서는 형편없을 뿐 아니라 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형편없는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두드러져 보인다.

신약 성서에 관한 한 나는 한 번도 요한계시록까지를 완독하지 못했고, 쓰여진 글을 매끄럽게 읽어 나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구약 성서도 많이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관심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신을 언급하지 않고 창조에 대한 글을 썼던 많은 사람들이 드는 예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예에서는 문제의 해결책이 곧바로 인식되고 환영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경험은 아니다. 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해결책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받은 것이다. 그 선물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가진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일상적으로 다니던 길이 아니었다. 나는 이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 선물은 너무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나의 첫 반응은 이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문제는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께서 내가 가진 그런 사소한 문제를 도우러 직접 나섰다는 점이다.

나는 왜 신께서 나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내겐 이런 은총과 계시의 경험은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이 언제나 우리를 보우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2. 신의 목소리

신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히 낯선 경험이다. 그 소리는 하늘에서부터 들려오는 크게 울리는 남성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길, 그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작아서 거의 목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같아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그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지만, 결코 그들의 생각이 아니다.

신의 계시를 알아차리는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목소리'와 자신의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선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신의 말씀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곧 광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신의 목소리를 구분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갖고(여러분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들은 것이 진정 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인지를 실제 실험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처음에 그 목소리를 무시해 버린다면, 그 목소리는 나에게 다니엘서를 읽으라고 계속 재촉했듯이 언제나 반복해서 들린다.

둘째, 성령의 목소리는(예수님께서 '위안자'라고 부르셨는데) 언제나 건설적이지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당신에게 무엇인가 색다른 일을 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좀 위험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정적으로 위험한 일은 결코 아니다. 만약 당신에게 자살을 하라든가.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라든가 아니면 평생 모아 둔 돈으로 요트를 사는데 다 써버리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는 게 좋다. 그 목소리는 대개 조금은 이상하게 들린다. 바로 이점 이 자신의 생각과 그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 이 목소리에는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성령의 목소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또는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무언가 새롭고 예기치 않은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 목소리는 부드럽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장벽을 헐고 마음을 열게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처음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타내는 첫 반응은 머리를 흔드는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다시 말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는 방법은 우리의 꿈.

특히 카를 융이 '큰 꿈`이라고 명명했던 것을 통해서이다. 작가님이 개업을 하고 있을 때. 환자들 중 일부는 꿈에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주 완벽하고 상세하게 그들이 꾼 꿈 하나 하나를 기록해 가면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는 대부분의 꿈을 분석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그런 방대한 양의 꿈이 오히려 보다 의미 있는 영역을 분석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사람들은 꿈을 좇아가지 않고, 꿈이 그들에게 찾아오도록 하고, 그들의 무의식으로 하여금 어떤 꿈이 의식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지를 선택하도록 하는 걸 배워야 했다.

환자 자신이 가진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버리고, 자신의 의식 세계와 좀 더 수동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요청하면서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환자가 꿈을 좇아다니는 의식적인 노력을 그만두게 되면, 기억할 수 있는 꿈의 양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는 놀랄 만한 향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환자가 더 이상 의식적으로 꿈을 좇아다니지 않게 된 결과로 무의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선물인 그들의 꿈은 치료 과 정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해 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환자 중에는 꿈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치를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심리 치료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든 꿈을 무가치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의식으로부터 지워 버렸다. 이런 환자들은 자신들의 꿈을 기억하고 꿈 속에 숨어 있는 귀중한 보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꿈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꿈의 가치를 인식하고 꿈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이것을 충분히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때로는 꿈을 좇아가거나 기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이 진정한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만들 어야 한다. 카를 융이 말하는 '큰 꿈'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 꿈들은 "나를 기억하라" 하고 스스로 소리치는 꿈이다.

3. 거부자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와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총과 계시를 드러내는 증거에 둔감한 것일까? 거기 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이든 세속주의자 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게 만드는 증거에 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처음으로 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무엇인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몰아내고 신을 우리 삶의 인도자로 받아들이게 되면, 분명히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는 힘을 스스로 놓아 버리는 것이다(내가 자세히 설명한 우리 삶을 이끄는 신의 '큰 꿈'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많은 세속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신의 증거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중립적인 또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요즘엔 어떤 유형의 중독자들이나 그들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상당한 증거가 있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한 부정은 아주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심리 과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부의 세속주의자들을 세속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경우는 단순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신에게 다가가길 피하고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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